서울지방변호사회보(2017. 6. 1.자)
나의 소송이야기
![]() 변호사 업무를 시작한 지 어느덧 십 년이라는 세월이 지나갔다. 나름 인권변호사로서 길을 걸어 간다고 자부하고 있었고, 어느날 갑자기 20년 전 대학미팅 때 만났던 상대방이 방송과 인터넷 검색을 통해 꿈을 잘 실현해 가고 있는 모습이 보기 좋다는 격려의 이메일을 보내 주었다. 인권변호사라는 직함이 나쁘지 않았고, 뭔가 있어 보였으며, 좀 더 의미 있고, 보람된 사건에 대한 변론을 맡았으면 하는 바람이 하루 하루 간절해져 갔다. 기본적인 인권을 옹호하고 사회정의를 실현함을 사명으로 한다고 변호사법에 규정되어 있지 않았던가.
그러던 어느날, 한 통의 상담전화가 걸려왔다. 자세한 사정을 뒤로 한 채 일단 국가를 상대로 하는 손해배상 청구사건과 형사 재심사건을 맡을 수 있냐는 것이었다. 어느 영화에서 많이 보던 장면이 갑자기 떠올랐다. 구체적인 내용은 방문을 통하여 상담을 하겠다고 하였다. 큰 대어를 기다리던 낚시꾼이 입질을 만난 것처럼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라는 기대감에 마침내 하나님께서 인권변호사로서 종지부를 찍으려고 한다고 내심 기뻐하였다. 상담이 잡힌 날짜에는 너무 설레 아침잠을 설치기까지 하였다. 아내에게도 출근하면서 인권변호사로서 길을 가는 것에 대한 자부심과 함께 크게 생색을 내었다(지금은 박준영 변호사가 재심사건으로 유명해졌고, 영화제목에 재심이 등장했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재심은 일반 변호사가 접근하기 어렵고, 해보기도 어려운 사건이었다).
원래 오후 5시 계획되었던 상담이었는데, 갑자기 전화가 와서 시간을 당겨서 상담을 받고 싶다고 하였다. 그날은 오후 2시와 4시에 재판이 있어서 부득이 3시밖에 시간이 안 된다고 하자 3시에 사무실이 아닌 법원으로 오겠다고 하였다. 2시 재판을 마치고 오후 3시경 법원 20층 스카이라운지 휴게실로 갔다. 상담자는 무거운 뿔테로 된 안경을 끼고 반바지 차림에 아주 익숙한 표정으로 휴게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지금 안양교도소를 출소한 지 3일째 된다고 하면서 자신을 소개하는 상담자는, 인권변호사를 보고 강동노회 목사님을 거론하면서 그 목사님으로부터 변호사님의 존재를 알게 되었는데 평소 좋은 일을 많이 하신다는 소문을 듣고 이렇게 외람되게 찾아왔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간의 사정을 들어 보았다.
3년 전 제주 시내 술집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하였다. 술집 주인이 원한 관계로 인해 흉기에 찔려 사망을 한 사건이다. 상담자는 중국집에서 배달 업무를 하고 있었는데 마침 그날 점심 때 술집으로 짜장면 배달을 가서 술집 문을 열었는데 주인이 흉기에 찔려 사망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제주지검에서 조사를 받았고, 현장에 상담자 혼자만 있었기 때문에 살인누명을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불행 중 다행히도 1심에서는 무죄가 선고되었지만, 검찰이 항소하여 항소심에서 징역 15년이 인정되었고, 대법원에 상고를 하였지만 상고가 기각되어 그대로 확정되어 복역을 하고 있었는데, 3년 만에 진범이 잡혔다는 것이다. 제주 시내 모 술집에서 진범들이 술김에 자신들의 범행을 자랑삼아 이야기를 하였는데, 마침 그 옆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형사가 이를 잡아서 범행 일체를 자백받았다는 것이다. 영화에서나 일어날 듯한 일이지만, 상담자가 워낙 분위기를 그럴싸하게 만들어서 이것이 영화 속 일인지, 현실 속 일인지 구분하지 못한 채
상담자는 교도소를 나오는 길에 각 방송국 보도실에 이미 연락을 하였는데 자신의 말을 믿으려고 하는 것 같지 않다고 하면서 변호사님께서 방송부분도 준비를 해 달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인권변호사는 여기까지 이야기를 듣고 영화와 같은 일들이 현실로 일어났다는 것에 대하여 상담자를 동정하기도 하고 법원과 검찰을 싸잡아 비난하기도 하였다. 수사기관과 법원의 오판이 한 남자의 인생을 완전히 망가뜨린 것이 아닌가. 또한 언론에 크게 보도되어야 할 사건이 아닌가. 이제 인권변호사는 이 상담자의 사연을 그저 도와주고 싶은 마음만 간절했다. 첫째는 형사재판 재심을 통해서 상담자의 억울함을 풀어 주어야 하고 둘째는 국가를 상대로 하는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그동안 상담자가 입은 금전적, 정신적 피해를 배상받아 주어야 하는 것이다. 속된 말로 땅 짚고 헤엄치는 사건이다. 다만, 형사 재심사건은 제주도에서 해야 했기에 제주도 소재 변호사를 소개시켜 준다고 하고, 국가상대 소송만 맡아서 무료로 변론을 해 주겠다고 약속을 하였다. 제주도에 가서 관련 형사판결문과 재판자료를 보내주면 바로 소송에 들어갈 수 있고, 소송비용으로 인지대와 송달료 등은 소송구조신청을 하면 문제될 것이 없다고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인권변호사는 간만에 보람된 사건을 맡을 수 있다는 기대에 부풀어, 상담자의 가족관계를 물었다. 부모님은 어릴 때 사고로 모두 돌아가셔서 안 계시고, 지금 제주도에는 할아버지만 계시다는 것이었다. 인권변호사의 가슴은 더욱 미어졌고, 동정심은 최고조에 달하게 되었다. 정말 구제해야 하는 불쌍한 영혼이었기 때문이다. 어느새 오후 5시 재판을 하러 가야 하는 시간이 다가왔다. 상담자는 약간 쭈뼛 하면서 변호사님이라고 부르더니 한 가지 청이 있다고 하였다. 무엇이든지 들어줄 기세로 부탁을 물어보니, 제주도까지 내려가야 하는데 여비가 없다는 것이었다. 인권변호사는 지갑에 만 원짜리가 몇 장 없자 친절히 법원 2층 신한은행에 있는 현금자동지급기까지 상담자와 함께 가서 10만 원이면 제주도까지 여비가 부족할 것 같아서 20만 원을 인출하여 봉투에 넣어서 제주도에 잘 다녀오라고 하였다. 그때 마침 검찰 출입을 하는 ABC K기자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보도할 만한 사건 없냐는 것이다. 인권변호사는 방금 상담한 따끈따끈한 사건 이야기를 간략히 해 주었다. 특종의식이 투철한 K기자는 한달음에 카메라맨과 함께 법원 쪽으로 건너와서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그날 밤 9시 뉴스에 특종을 보내기 위한 것이었다. 인권변호사는 뿌듯한 마음으로 재판을 하러갔고, 상담자 역시 즐거운 마음으로 헤어졌다. 인권변호사는 마지막 재판을 마치고 6시경 흐뭇한 마음에 법정을 나와 사무실로 향하였다. K기자로부터 전화가 왔다. 방금 인터뷰한 사건과 관련하여, 형사 판결문을 검색했는데 판결문이 없다는 것이다. 상담자의 이름과 주민번호로 아무리 판례 검색을 해도, 3년 전 살인사건에 대한 판결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상담자에게 아무리 전화를 해도 전화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혹시 상담자가 여비 달라고 해서 준 돈이 있는지 물었다. 인권변호사는 아주 여유 있게 ‘그럼 제주도 가는 데 20만 원은 있어야지. 배 타고 갈 수는 없잖아.’ 그러자, K기자는 다시 확인해 보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인권변호사는 아무런 생각 없이 상담자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는 계속 갔지만,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전화를 받지 못할 상황에 있겠다는 생각에 가던 길을 계속 갔다. K기자는 다급한 목소리로 다시 전화가 와서 자신이 인터넷으로 3년 전 제주도 룸살롱 살인사건으로 검색을 해보아도 그런 사건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 정도 사안이면 언론에 보도가 되었을 것인데, 뭔가 이상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K기자는 상담자가 자신에게도 여비를 달라고 했다고 하면서, 완전 물먹었다고 했다. 그제서야 인권변호사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국가상대 손해배상 청구, 재심 청구, 안양교도소, 강동노회, 인권변호사. 아, 도대체 이건 무슨 운명의 장난이라 말인가. 서울구치소에 잡범으로 있다가 어느 목사님을 통해서 인권변호사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여비 뜯으러 나온 사기꾼이었던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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